스쳐 가는 감각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바람을 맞고, 불을 바라보고, 땅을 밟는다. 매일 스쳐 가지만 좀처럼 의식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나 익숙한 일상에서도 문득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이 있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작은 감각 하나가 생각을 불러내기도 한다.
헤이스트링(Hey string)이 2022년부터 이어오고 있는 ‘사유’의 출발점도 여기에 있다. 사람과 사물, 공간과 날씨, 감정처럼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을 다시 바라보고, 그 안에서 놓치고 있던 감각과 생각을 음악으로 꺼내는 작업이다.
<서큘레이터>는 ‘사유’의 두 번째 시리즈다. 이번 작품에서 헤이스트링이 주목한 것은 물, 불, 공기, 흙이다. 네 가지 원소는 서로 만나고 변화하며 끊임없이 다른 상태로 이어진다. 공연의 시선은 그 움직임을 따라 자연에서 인간으로 이동한다.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엇이 내게 남는가.
가야금의 가능성, 사유의 구조로
헤이스트링은 오지현, 김지효, 박지현으로 이루어진 가야금 창작음악 그룹이다. 이들은 새로운 장르를 연주한다는 개념을 넘어선다. 오히려 가야금이라는 악기 안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능성을 탐색해 온 팀이라 할 수 있다.
25현가야금과 철현금 등 서로 다른 재질과 발현 방식에서 생기는 음색을 활용한다. 전통적 주법에 머물지 않고 현을 두드리거나 마찰하며 활과 채를 사용하는 등 발음법 자체를 확장해왔다. 세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리듬과 음형은 반복되고 중첩되며 변형된다. 작은 소리가 다른 소리로 옮겨가고, 서로 겹치면서 하나의 큰 음향을 만들어 간다.
이들의 창작적 관심은 점차 악기의 물성에서 인간의 감각과 기억, 그리고 사유로 확장되었다. 초기에는 전통악기의 새로운 사운드를 탐색하는 데 무게가 있었다면, 최근에는 음악이 관객에게 어떤 경험과 생각을 남길 수 있는가를 고민해 왔다. 공간, 설치, 퍼포머의 움직임이 음악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커졌다.
그런 점에서 <서큘레이터>는 헤이스트링이 걸어온 창작의 궤적과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악기에서 소리로, 소리에서 감각으로, 감각에서 사유로, 다시 자연과 인간으로 관심의 범위를 확장해온 흐름 위에 놓여 있다.

물과 불과 공기와 흙
공기는 움직이고, 불은 번지며, 물은 흐르고, 흙은 쌓인다. 하나의 상태는 고정되지 않고 다른 상태로 넘어간다. 헤이스트링의 음악도 작은 리듬과 음형이 반복되고 전달되며 중첩과 변형을 거친다. 원소를 단지 소리로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변화하고 이어지는 원소의 속성을 음악의 구조 안으로 가져오는 셈이다. 자연의 순환과 음악의 생성 방식이 이 지점에서 만난다.
이번 작품에서는 소리가 신체와 오브제까지 확장된다. 기존의 세 연주자에 퍼포머 오예현이 함께하며, 가야금 음악과 움직임, 설치, 공간 안의 사물 변화가 하나의 장면을 이룬다. 퍼포머의 행위는 단순한 시각적 효과가 아니라 각 원소가 가진 생명력과 순환의 과정을 몸으로 표현하는 장치다.
공기에서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움직임이 확장되고, 불에서는 촛불을 중심으로 몸의 궤적이 만들어진다. 흙에서는 포대에서 흘러나온 흙이 바닥에 쌓이고 그 안에 퍼포머의 발이 묻힌다. 이처럼 <서큘레이터>는 가야금·신체·오브제·공간의 관계를 다루는 복합적 퍼포먼스에 가깝다.
자연, 인간 그리고 다시 사유
자연의 원소에서 출발한 공연은 후반부에 ‘걷기, 달리기’라는 인간의 신체로 이동하고, 마지막에는 ‘사유의 리듬’에 도달한다. 이 흐름은 <서큘레이터>가 자연의 순환을 보여주는 데 머물지 않음을 드러낸다. 자연을 향하던 시선은 신체를 거쳐 다시 인간의 내면으로 돌아온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퍼포머가 퇴장하고 세 연주자의 음악만 남는다. 앞선 장면을 채웠던 신체와 오브제가 사라진 자리에서 관객은 자신이 보고 들었던 감각을 되짚는다. 자연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일은 그렇게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일로 전환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은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한때 내 안에 머무르던 것들에 대하여
<서큘레이터>는 관객에게 하나의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가 자신의 기억과 경험으로 작품을 해석하기를 기대한다.
2024년 초연이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거의 없는 화이트박스에서 이루어졌다면, 이번에는 서울남산국악당의 극장 무대로 옮겨온다. 공간의 구조가 달라진 만큼 음악과 퍼포먼스, 원소의 움직임이 객석까지 어떻게 확장될지 또한 이번 공연에서 확인할 지점이다.
어쩌면 공연 이후 남는 것은 거창한 메시지가 아닐 수도 있다. 집으로 돌아와 흐르는 물을 잠시 바라보고,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이전과 조금 다르게 느끼는 것. 그렇게 무심히 지나쳤던 감각이 다시 의식되는 순간, 공연에서 시작된 사유는 일상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에는 수많은 사람과 사물, 감각과 기억이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것들 가운데 무엇은 기억이 되고, 무엇은 감각이 되어 지금의 우리를 이룬다. <서큘레이터>가 자연의 순환을 따라 되돌려놓는 시선은 결국 한 지점을 향한다.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한때 내 안에 머무르던 것들에 대하여.
헤이스트링 <서큘레이터>
- 일시: 2026. 10. 15.(목) 19:30
- 장소: 서울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홀
- 문의: 02.6358.5500
| 조용경 | |
| 작곡가이자 예술감독.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K-Heritage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가는 문화콘텐츠학 박사다. 한양대학교 실용음악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공연예술과 문화기획의 경계를 넘나들며 국가·지자체 문화예술 프로젝트 및 대형 문화행사의 예술감독·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예술과 사회를 잇는 칼럼니스트로도 활발히 소통 중이다. |
| 조용경 |
| 작곡가이자 예술감독.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K-Heritage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가는 문화콘텐츠학 박사다. 한양대학교 실용음악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공연예술과 문화기획의 경계를 넘나들며 국가·지자체 문화예술 프로젝트 및 대형 문화행사의 예술감독·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예술과 사회를 잇는 칼럼니스트로도 활발히 소통 중이다. |